마르 3,22-30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오늘 복음에는 신약 성경에 등장하는 빌런들이 줄줄이 거명된다. 베엘제불, 마귀, 사탄, 더러운 영 등이다.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얘네들은 어원도, 출신도, 배경도, 각자 흑화된 개인사도 다 다르다. 다만 이 복음에서는 한데 묶여 악의 세력을 가리킨다. 각자 세부 캐릭터가 어떻든, 빌런들에게는 구구절절한 서사를 부여할 필요가 없으므로 패스.
이제 논점은 이거다. 왜 율법 학자들은 저런 소리나 하고 있을까? 그리고 예수님이 하는 대답은 무슨 뜻인가?
우선 율법 학자들이 본문의 소개대로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 학자”라는 데에 집중해 본다. 예루살렘은 성전이 자리한 수도로, 명문 율법 학교들이 있었을 것이다. 바오로 사도가 자신이 예루살렘의 일타 율법 선생에게서 사사받았음을 자랑했을 정도다. 이 율법 학자들은 아마도 그런 데서 율법을 공부하고, 갈릴래아 같은 촌구석 아닌 수도에서 율법 전문가로 승승장구하고 있는 것이다. 또 율법 공부를 평생의 소명으로 확신할 만큼 신앙심이 깊었을 것이고 그만큼 얄짤없이 자신들이 배운대로 율법을 다 준수하고 있었을 터이다. 이들의 지적, 신앙적, 윤리적 자부심이 성경의 페이지를 뚫고 나와 여기까지 느껴진다. 단순히 예수님을 질투하거나 자신들의 밥그릇을 침해당하는 것이 화가 나서 예수님의 활동을 비난한다고 보기엔, 이들은 나름 진지하며 전문가의 품격이 있는 것이다. 그들은 율법의 수호자를 자처하며 진심으로 분노하고 있다.
이 “예루살렘” 출신 “율법 학자”들과 대척점에 예수님이 있다. “갈릴래아” 출신 “비 율법 학자”인 예수님은 보편적인 사실을 들어 그들에게 응대한다. 콩가루 집안이 무사한 적은 없다고. 또 누가 패기있게 진상을 부릴 때는 그보다 더 센 힘으로 제압해야 하지 않냐고.
이야기의 전체 흐름은 율법 학자들의 율법에 의한 판단과 예수님의 치유 활동을 대조시킨다. 율법 학자들의 주장은 어쩌면 그들이 이 “예수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율법을 열심히 찾아보고 신학적으로 숙고한 결과일 수도 있다. 근데 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할까? 그럼 율법이 잘못했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율법이 잘못했을 것 같지는 않다. 이사야서만 봐도 그렇고, 하느님께서 보내실 구원자라는 표지들 가운데는 병자 치유도 분명히 있다. 육신의 질병을 치유한다는 것은 꺼져가는 생명을 되살리는 것으로, 생명을 창조하고 키우신 하느님 전용 업무다. 복음에서 질병 치유 이적이 선포하는 건 이거다: 질병의 치유는 상징적으로 생명의 비가역적 파괴 상태를 원상복구하는 일이며, 그 일은 오로지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하느님의 선한 업적에 결코 악은 어떤 식으로든 기여할 수 없다. 악은 생명을 살리는 척 하지만 종국에는 그것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그럼 율법 학자들은 뭘 보고 예수님의 활약을 폄훼한 걸까? 역시 문제는 “율법을 해석”하는 쪽에 있을 수 밖에 없다. 이들의 판단력에 영향을 끼쳐 율법 해석을 오도한 요소는 무엇이었을까? 그들의 율법 지식이 모자라서는 아닐 것 같다. 아 그럼 진짜 뭘까?
본문에서 눈에 띄는 표현이 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내려온다.” 갈릴래아는 촌이니까,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보다 “낮다.” 그렇다면 그들은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 예수보다는 “높은” 곳에 있고 율법과 성전과도 훨씬 가까이 있다. 이렇게 볼 때 이들이 설정한 대립 구도는 “율법의 진정한 의미를 아는 우리 율법 학자들”과 “율법을 배우지 못한 마귀 들린 사이비”라는 구도다. 반면 예수님이 그들에과 설정한 대립 구도는”하느님이 주신 생명의 회복”과 “생명 회복을 악으로 치부하는 성령 모독”이다. 즉 율법의 글자를 뛰어넘어 율법의 본질을 들고 나와 응대하신다. 율법은 예수님의 단언대로 사람을 살리기 위한 것이다. 애초에 하느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그들을 살게 하시려는 거였다. 예수님은 치유 활동을 통해 사람을 살리신다. 곧 율법 수여를 통해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의 뜻을 구체적으로 드러내신다. 율법 학자들은 율법을 해석하고 그에 따라 자신의 삶을 하나의 오점 없이 살아내기 위해 율법을 준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의 핵심을 꿰뚫지 못하고 빙빙 돌고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율법이 오히려 그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게 하는 눈가리개가 된다. 율법의 글자와 말마디는 명석하게 설명할 수 있겠지만, 정작 그들은 자비롭지도 않고 편협하고 예수님과 그분의 활동을 자신들의 율법 이해를 잣대 삼아 단죄한다.
그런데 혹시 나도 그런 적이 있지 않을까? 나도? 열심히 기도하고 성경을 공부하는 나는 자비로운가? 관대한가? 다른 사람 안의 생명을 키워주는 사람인가? 내가 쌓아올린 신앙의 업적에 기대어 나 자신을 높이면서 타인을 율법주의적 잣대로 재단한 적은 없나?
다시 한 번 내 자신을 생각해보게 하는 복음 말씀이다. 더 생각해봐야겠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3,22-30
그때에 22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 학자들이,
“예수는 베엘제불이 들렸다.”고도 하고,
“예수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도 하였다.
23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부르셔서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어떻게 사탄이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
24 한 나라가 갈라서면 그 나라는 버티어 내지 못한다.
25 한 집안이 갈라서면 그 집안은 버티어 내지 못할 것이다.
26 사탄도 자신을 거슬러 일어나 갈라서면 버티어 내지 못하고 끝장이 난다.
27 먼저 힘센 자를 묶어 놓지 않고서는,
아무도 그 힘센 자의 집에 들어가 재물을 털 수 없다.
묶어 놓은 뒤에야 그 집을 털 수 있다.
2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29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
30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사람들이
“예수는 더러운 영이 들렸다.”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The scribes who had come from Jerusalem said of Jesus, 
“He is possessed by Beelzebul,” and
“By the prince of demons he drives out demons.”


Summoning them, he began to speak to them in parables, 
“How can Satan drive out Satan?
If a kingdom is divided against itself, that kingdom cannot stand.
And if a house is divided against itself, 
that house will not be able to stand.
And if Satan has risen up against himself and is divided, 
he cannot stand; 
that is the end of him.
But no one can enter a strong man’s house to plunder his property 
unless he first ties up the strong man.
Then he can plunder his house.  
Amen, I say to you, all sins and all blasphemies 
that people utter will be forgiven them.
But whoever blasphemes against the Holy Spirit 
will never have forgiveness, 
but is guilty of an everlasting sin.”
For they had said, “He has an unclean spir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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