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녀의 성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시어 인간에게 주신 신비롭고 아름다운 선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모상대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그들이 서로 사랑하고 하나가 되어 자녀를 많이 낳아 번성하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이 세상의 온갖 것들을 다스리는 하느님 창조 사업의 협력자가 되게 하셨지요(창세 1, 26~28. 2, 24 참조).
가톨릭에서 가르치는 남녀의 성관계는 혼인한 남녀가 서로의 사랑을 나누는 부부관계의 열매로서 자녀를 출산하고 교육하여 성 가정 공동체를 이루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비도덕적, 비윤리적인 사고와 함께 말초적인 성적 충족만을 추구하는 관계는 결국 하느님이 인간에게 주신 성의 아름다움과 품위를 타락시켜 욕정에 따르는 비인간적인 삶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한편 사랑하는 남녀가 참 만남으로 이루어가는 과정에 혼전 성관계로 사랑의 확인을 요구한다면 이것 또한 진정한 사랑을 이루기보다 성욕에 대한 집착과 이기적인 소유욕으로 서로를 억압하거나 서로에 대한 존경심과 신뢰심이 깨지는 관계가 되기 쉽습니다. 미숙한 인간의 감정은 서로의 약속과 결심에도 불구하고 변덕과 무책임한 관계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혼전관계는 특히 여성의 임신, 출산에 대한 심리적, 윤리적 불안과 갈등을 가지게 되며, 실제적으로 여성과 태아의 생명을 헤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혼전 관계는 성의 본성과 그 목적에 맞지 않고 하느님의 창조와 은총을 거스르는 행위이기 때문에 가톨릭교회에서는 혼전 성관계를 금기하며 중죄로 보고 있습니다.
현대 성의 문란과 가치관의 혼란 속에서도 성의 유혹과 갈등을 극복하고 혼전 순결을 지키는 것은 스스로 보존하는 것이고 진정한 결혼생활과 사랑을 이루기 위해 하느님 창조사업의 협력자로서 인간생명에 대한 책임감을 완수하는 것이지요.
“순결, 요즘 누가 그런 단어를 쓰나? 상대가 혼전순결을 지키고 싶다면 헤어져야지.” “나도 처음에야 엄마한테 미안한 생각이 들어서 많이 울었지만, 지금은 밥 먹고 수다 떠는 것처럼 섹스는 그냥 즐거운 일 중 하나가 됐다.” “원나잇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서로 원하면 문제될 건 없지 않나? 모텔비도 나눠 내면 경제적인 거고”
순결이 죄가 되는 세상
대학생 1254명에게 물어보니 45.6%가 성관계 경험이 있고, 성경험이 없는 대학생의 절반은 성관계를 하지 않은 이유를 기회가 없어서라고 대답했다. 23세 이상의 대학생의 66.1%, 25세 이상의 대학생의 82.1%가 성경험이 있다. 딴 나라 이야기가 아니라, 중앙일보(2014.5.21)가 보도한 우리나라 대학생들의 삶이다.
그런데 더 걱정스러운 것은 이 신문의 보도 태도다. “요즘 누가 순결이란 말을 쓰나요?”라는 제목에는 이미 ‘순결=시대착오적 의식’이라는 경멸적 관점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순결이 정말로 폐기되어야 할 구시대의 악덕일까?
문화와 성의식 형성
성의식은 문화와 그 문화를 형성시켜 주는 매체에 의해서 무의식적으로 형성된다. 과거의 인쇄매체와 현재의 영상매체가 각각 형성해주는 성적 감수성은 천양지차로 다르다. 고전 명작에 담긴 내용과 뮤비나 광고 등의 영상물이 품고 있는 내용이 극명하게 다르기 때문이다.
대학 신입생들에게 낭만적인 첫 키스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써보라고 하면, 여학생의 70%는 ‘눈 내리는 날 가로등 불 밑에서’, 남학생의 50%는 ‘골목길에서’라고 쓴다. 왜 이렇게 답이 획일적일까? 어려서부터 수없이 본 광고, 영화, 드라마, 뮤직비디오 등이 낭만적 첫 키스의 표준을 그렇게 각인시켰던 것이다. 무의식 속 내용은 빛을 비춰주기 전까지는 그 존재조차 파악하기 어렵지만, 사람의 행동에 심대한 영향을 미친다. 이것이 현대인의 집단 무의식을 형성하는 대중문화의 한 단면이며, 젊은 세대의 성행동이 나오는 뿌리다. 청소년들이 영상물을 통해서 첫 키스만 봤을까?
젊은 세대가 성관계를 재미있는 놀이로 인식하고, 성관계를 쉽게 하는 것은 저절로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니다. 문화 산업, 포르노 산업, 피임 산업 등이 만들어낸 대규모 유행 현상이다. 세계관이 정립되어 있지 않고 또 무엇이든 각인시키기 쉬운 뇌구조를 가진 아이들의 경우, 보는 것이 즉 하는 것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위인전 읽고 감동하면서 성장해야 할 아이들이 포르노 보고 흥분하면서 성장한 결과, 연애하면 당연히 성관계해야 한다는 강박과 그 실행이 나타난 것이다.
섹스 이데올로기의 탄생과 문화적 폭력
거대 기업이 매스미디어를 활용해서 만든 이러한 문화적 강박이 바로 ‘섹스 이데올로기’이며, 그 핵심은 ‘성욕을 가진 인간은 그 욕망을 어떻게든 충족시켜야 한다.’이다. 연애하면 당연히 섹스를 해야 하고 애인이 없으면 원나잇이라도 해야 하는, 섹스 자체가 목적인 성의식인 것이다. 이는 대중문화가 만들어낸 현대인의 무의식이자 습관이다. 아무리 생소하고 낯선 것이라도 TV가 반복하면 당연한 것으로 인식된다.
이것이 TV가 수행하는 사회적 공인 기능인데, 우리나라처럼 인문학적 기초가 부족한 사회일수록 TV가 가지는 이 힘이 매우 강력하다. TV는 드라마와 유명인이 연출하는 섹스 중심의 토크쇼를 통해서 놀이화된 가벼운 섹스를 보편타당한 가치로 각인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모든 집단적 이데올로기가 그렇듯이, 여기에 동의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이것은 심각한 폭력이 된다.
대학에 와서 문화충격을 받았다. 결혼하지 않은 커플이 성관계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또 내 나이의 대학생도 성관계를 맺는다는 것을 알았다. 여기까진 괜찮았다. 그런데 원나잇을 하는 사람이 꽤나 많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정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나는 다른 사람을 잘 이해해 줄 수 있는 포용력이 큰 사람이니까. 나는 내가 옳다고 믿는 것을 지켜나가면 되니까. 그런데 남자 친구를 사귀면서 정말 큰 혼란을 겪게 됐다. 그가 성관계를 요구했다. 첫 남자 친구가! 혼전순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며 운을 띄웠다. 충격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정말로 이런 일이 내게도 일어나다니. 너무나 혼란스러웠다. 며칠간의 고민 끝에 확신이 없는 거부를 했고, 점점 멀어지던 그와는 헤어지게 됐다. 다른 남자 친구를 만나면서도 기다려달라는 말로 달래며 만남을 이어갔다.」
남자 친구의 성관계 제안에 충격을 받고 헤어짐을 선택한 여대생은 순결의 덫에 걸려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어리석은 여성일까? ‘순결 아니면 죽음을 달라!’라는 구호와 은장도로 대표되는 순결 이데올로기는 여성을 억압하는 굴레이기 때문에 당연히 폐기되어야만 한다. 그렇다고 순결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는 길이 섹스 이데올로기로 직행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대한민국은 완전히 길을 잃었다. 섹스 이데올로기가 침투력 강한 매스미디어를 통해 확산되면서 사람들을 대규모로 속이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의 속이는 영(靈)
남자 친구가 성관계를 하려 하지 않아 고민이라는 여성의 사연을 들은 진행자들이 ‘강제순결’이라는 단어를 만들어내서 시청자의 폭소를 자아내며, 남자의 건강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며 남자를 성불구자로 취급하여 더 큰 웃음을 끌어내는 인기 최고의 토크쇼가 있다. 중학생들까지 꼬박꼬박 챙겨본다는 jtbc의 ‘마녀사냥’이다.

중앙일보는 “요즘 20대에게 섹스는 엄숙한 의식이 아니라 당당하고 즐거운 유희입니다. 성인식은 인간에 대한 가장 근원적인 인식과 통합니다. 요즘 20대가 생각하는 인간에 대한 근본 자세로 읽어도 무방할 것입니다.”라고 보도한다. 객관적인 사실보도 같지만 실제로는 같은 회사인 jtbc ‘마녀사냥’을 띄워주는 기사다.
종편 방송이 주도하고 같은 회사 신문이 뒤를 밀면서 정당화하는 쾌락의 성문화에는 정말 아무런 문제가 없을까? “성=즐거움의 도구”라는 성의식에서 도출되는 인간에 대한 근원적인 인식은 “타인=내 즐거움의 도구”다. 타인을 도구화함으로써 나를 포함한 모든 인간을 수단화하는 문제가 발생하는데도, 이 신문은 이를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 전통적 가치 질서를 수호한다는 보수를 표방하는 거대 신문사가 문제 현상을 탐사보도하여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쾌락과 방종을 조장하고 있는 것이다.
섹스 이데올로기가 가지는 궁극적 문제는 인간 생명을 죽인다는 사실이다. 완벽한 피임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쾌락만을 위해서 성을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낙태는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마녀사냥’에 나와서 희희낙락 쾌락의 성만을 떠드는 그들에게 물어야 한다. 그렇게 살면서 임신은 몇 번 했고, 낙태는 몇 번 했는지. 수많은 섹스 파트너와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는 그 삶이 정말 행복한지. 상식이 있는 지성인이라면 방송의 연출 뒤에 감추어진 진실을 꿰뚫어 보고, 속아넘어가는 사람들에게 그 거짓을 알려줘야 한다.
고대 우상종교의 인신공양과 현시대의 섹스 이데올로기가 공통적으로 집어삼키는 것은 인간 생명이다. 미개한 시대의 인신공양이 현시대에 문화의 형태로 재탄생한 것이 섹스 이데올로기인 셈이다. 거대 미디어가 욕망을 자극하면서 재미있게만 보여주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 죽음의 덫을 인식하지 못하고 속는다. 그러나 링컨 대통령의 말처럼, 모든 사람을 얼마 동안 속일 수는 있고 또 몇 사람을 영원히 속일 수도 있지만 모든 사람을 영원히 속일 수는 없다.
스스로 생각하여 진리의 깃발을 잡아야
태초에 뱀이 선악과를 보여주며 남녀가 함께 그것을 따먹도록 한 그 일을 이 시대에는 방송이 대규모로 하고 있다. 속임수의 도구가 태초나 지금이나 똑같이 성(性)인 이유는 성을 타락시켜야만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가장 큰 선물인 생명을 파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생명의 복음’ 97항에서 “성을 하찮은 것으로 만드는 일이 새 생명을 경시하게 하는 주된 요인들 중 하나입니다. 참된 사랑만이 생명을 보호할 줄 압니다.”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진실임에도 불구하고 미디어를 통해서 잘 전파되지 않는다. 가톨릭 교회의 신자들은 속임수에 넘어갈 것이 아니라, 이 시대가 은폐한 진리의 깃발을 잡고 흔들어야 한다. 상식을 가지고 잘 생각해보면, 참과 거짓을 분별할 수 있다. 미디어가 유혹하는 화려한 지뢰밭으로 들어갈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나는 주 너희 하느님이다. 너희가 아모리족의 땅에 산다고 해서 그 신들을 경외해서는 안 된다.”(판관기6:10)는 풍요의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느님이 하신 말씀이다. 쾌락과 번영의 신이 유혹해도 흔들려서는 안 된다는 준엄한 명령이다. 하느님은 유혹의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명령하신다.
“나는 주 너희 하느님이다. 너희가 쾌락의 땅에 산다고 해서 욕망을 따라 방종해서는 안 된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깨어 있어야만 쾌락의 땅에서 길을 잃지 않고 정결을 살 수 있다. 정결은 이 시대 가톨릭 청년 신자가 걸어야 할 순교의 길이며, 세상을 치유하는 십자가의 길이다.
사랑과 생명의 인문학 후원: 농협 079-12-343065 이광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