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 23,13-22 연중 제21주간 월요일

오늘은 복음은
마태오 복음 23장에 걸쳐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시는
내용의 일부입니다.
21장에서 예수님서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려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이로인해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긴장이
최고조에 달합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21, 12-17)하시는 과정에서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이
불쾌함’을 드러내고(21, 15-16),
예수님의 권한문제로 시비를 걸고(21, 23-27),
두 아들의 비유(21, 28-32)와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21, 33-46)에서
‘자기들을 두고 하신 말씀임을 알아듣고
그분을 붙잡으려 하였으며(21, 45-46),
황제에 대한 세금납부 문제로
예수님을 시험하고(22, 15-22),
사두가이들은 부활논쟁에서
예수님께 참패를 당하고(22, 23-33),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인가로
예수님을 또 시험했지만(22, 33-40)
그들은 번번히 제대로 된 답을 내지 못하고
물러나야만 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23장에 이르러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꾸짖으시면서 7번의 무시무시한(?)
불행선언을 하십니다.
구세주이신 그분께서 행복선언이 아니라
종교 지도자들을 향하여
‘너희들이 계속 이렇게 살고 행하면
불행해질 것이다’ 라고 선언하십니다.

불행선언의 시작은 이렇습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향하여
꾸짖으시는 이유는
그들의 위선때문입니다.
겉과 속이 다르고, 말과 행동이 다른 위선!
내가 하는 것과 남이 하는 것에 대한
평가의 잣대가 다른 위선!
너와 내가 어찌나 다른지요.
우리의 시선은 대부분의 경우 밖을 향해 있습니다.
그래서 타인을 평가하고, 판단하고,
단죄하는 것이 쉽게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그 시선이 나를 향할 때는
언제나 정당한 이유가 있고,
그럴 수 밖에 없는 합리적인 설명들이
줄줄이 이어집니다.
타인을 향해서는 사랑과 선의를 부르짖으면서
정작 내 요구에는 사랑을 담지 않고,
이웃을 향해 정의의 실천을 외치면서
정작 나는 이웃의 정의를 위해
나를 희생하는데 인색하고,
남에게 가르치는 것은 쉽게 하면서
그 가르침을 내가 살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그러면서 내가 그렇게 말하고, 가르치고, 외치고 있기에
나는 그대로 살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착각이고, 교만이지요.
자기를 알지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내 생각 속에서, 내 정의 속에서, 내 세상 속에서
허상으로 만들어진 내 삶에 속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를 비추어 보고, 성찰할 수 있는 능력은
참으로 귀한 것입니다.
거울로 남을 비추기보다 나 자신을 비추어 보고
내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얼마나 닮아가고 있는가?
어떻게 하느님의 정의와 평화를 살고 있는가?
성찰하면서 계속 하느님께로 되돌아갈 때(회개)
우리는 예수님의 행복선언을 듣게 될 것입니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5, 5-9).
-제노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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