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보다 아무것도 더 낫게 여기지 말라.
Chisto omnino nihil praeponant. R. B.
– 머리말 72,11
▶ 성스러움은 단순히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데 있지 않고 그분의 뜻을 원하는 데 있다. 성스러움은 하느님과의 결합인데 그분의 뜻을 행하는 모든 사람이 그분 뜻과 일치를 이루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죄를 짓는 사람도 죄의 결과로 인해 하느님 뜻이 실현되는 데 도움은 되지만, 그들의 죄를 지음으로써 하느님께서 원하지 않으시는 것을 공식적으로 원하는 것이다. 또 사람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바를 원하지 못해서 죄를 짓기도 한다. 하지만 그처럼 죄를 짓는 경우에도, 사람이 하느님 뜻에 반대되는 것을 원하는 동안에도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은 그 죄인을 통해서도 어김없이 이루어진다.
▶ 하느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항상 알 필요는 없다. 사람은 나무나 동물들처럼 평생에 걸쳐 하느님의 뜻을 행하며 살면서도 그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아채지 못할 수도 있다. 다만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바를 자신도 원하고 싶다면, 그분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자 노력해야만 한다. 최소한 그분이 원하시는 바를 알기를 갈망해야 한다.
▶ 우리를 둘러싼 신비를 캐내고자 하는 열망이 지나치다면 우리는 예언자들이 지녔던 경의를 잃어버리고, 대신에 점쟁이의 무례한 태도를 갖게 될 것이다. 즉, 징후들의 의미가 우리에게 닫혀져 있을 때 우리는 그 앞에서 침묵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경솔하게 출입구에 이르는 계단의 수나 한 장의 카드, 사다리의 그림자, 새들의 비상 등을 이용해 마음대로 미신적으로 해석하려 들 것이다. 하느님의 뜻은 그런 열쇠로 열 수 있는 값싼 신비가 아니다!
▶ 인간은 섬이 아니기에 서로에게 의지하며 산다. 따라서 의식적으로 다른 사람들이 자기 삶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이룩하는 것을 돕지 않는다면 자신의 삶 안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이룰 수 없다. 다시 말해 그분의 뜻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해지는 것, 변화되는 것, 다른 사람들과 더 깊이, 더 완전하게 융합되는 것이다. 그 결과, 우리 자신의 인격은 흡수되거나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긍정되고 완성된다.
▶ 인간의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올바른 빛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볼 수 있는 양심, 자신의 의지에 의한 응답을 강력하면서도 분별력 있는 사랑으로 결심하는 양심을 형성하는 것이다. 그것이 참된 지혜이다.
▶ 쓸데없이 세세한 구별을 하며 이러한 자기 헌신의 기회들에서 빠져나가려고 자기 행동을 합리화하는 형식주의자는, 하느님의 뜻에 대해 이론을 내세우고 독단적으로 단정할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그 뜻을 결코 완전히 수행하지는 못한다. 그는 결코 하느님 사랑의 영향력에 진정으로 자기를 맡기지 못하기 때문이다.
▶ 하느님은 우리에게 이론적으로 최고, 최상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다. 나쁜 문필가보다 착한 거리의 청소부가 되는 편이 낫고, 나쁜 의사보다는 좋은 바텐더가 되는 편이 낫다. 즉 해골산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은 참회한 도둑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소위 거룩한 이들보다 훨씬 더 완전한 사람인 것처럼 말이다.
▶ 바리사이들은 율법을 문자 그대로 지키고 빈틈없이 완전함을 추구하며 평생을 보냈지만 개념적 완전함에 열중한 나머지, 하느님께서 구체적이고 명백하게 당신의 뜻과 완전함을 드러내셨을 때 그것을 거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단순한 의도는 하느님께서 내려 주시는 귀한 선물이다. 그것은 가난하기에 귀하다. 가난은 신앙인들도 진심으로 좋아하기 힘든 선물이다. 사람들은 종교가 적어도 영적으로는 부유하게 만들어 주기를 원한다. 만약 자신이 세상 모든 것을 포기한다면 영원한 삶뿐만 아니라, 죽기 전에 약속된 ‘백배의 상’을 손에 넣기를 원한다.
▶ 올바른 의도가 있는 사람은 일의 결실을 잃을 위험에 대해서도 고요히 직면할 수 있다. 또 단순한 의도가 있다면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그 결실을 포기할 수 있다. 그리고 결실은 기대조차 하지 않는다. 이런 대가를 치르고 나서야 우리가 하는 일이 곧 기도가 될 수 있다.
▶ 올바른 의도는 올바른 활동만을 목표로 한다. 그러나 활동 한가운데서 하느님 외의 모든 것을 포기하는 단순한 의도는 오직 하느님만을 추구한다.
▶ 십자가를 아는 것은 우리 자신의 고통을 아는 일뿐만은 아니다. 십자가는 구원의 징표이고 아무도 자신의 고통으로 구원받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십자가를 안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통에 의해 구원받았으며,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고통과 죽음을 겪으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아는 것이 곧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
▶ 하느님께서는 고통을 창조하지 않으셨다. 고통과 죽음은 인간의 타락과 함께 세상에 왔다. 그러나 인간이 하느님과의 결합이라는 기쁨보다 고통을 우선적으로 선택하자, 하느님께서는 고통을 인간이 하느님을 완전히 알 수 있게 되는 방법으로 변화시키셨다.
▶ 고통이 갖는 효력은 우리가 무엇을 사랑하느냐에 달려 있다. 우리가 이기적으로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면 고통은 단지 밉살스러울 뿐이다. 그래서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고통을 피하려 들게 되고, 그로 인해 우리 안의 모든 악이 나온다. 결국 이기적인 사랑은 오직 자신의 고통을 피하기 위해 어떤 죄든 저지르게 되고 다른 사람에게 악행을 서슴지 않게 된다.
▶ 고통은 하느님께 봉헌될 때만 우리의 삶에서 가치를 지닌다. 봉헌은 사제의 행위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고통은 그분의 교회에 의해 하느님께 봉헌되어야만 한다. 교회만이 우리의 고통을 그리스도의 피 속에 동참시킬 권한을 가진다. 교회 만이 그분의 수난이 가져온 무한한 부를 소유하며 사제로서의 그분의 권한을 대행할 사람들을 내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머뭇거림 없이, 미움 없이 고통당하라. 복수나 보상에 대한 희망 없이 고통당하라. 고통의 끝을 기다림이 없이 고통당하라.
▶ 머뭇거림 없이 고통 앞에 서기 위해서는 보다 큰 고통, 즉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께 눈길을 돌려야 한다. 그리고 증오하지 않고 고통 당하기 위해서 우리는 예수님을 향한 사랑으로 마음에서 원한을 몰아내야만 한다. 보상에 대한 기대 없이 고통당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예수님과 결합해 있다는 확신에서 모든 평화를 찾아야 한다. 이는 수덕의 기술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단순히 믿음의 문제이다.
▶ 우리는 수동적인 자세에서 벗어나 하느님께서 주시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려고 해야 한다. 모든 면에서 그분의 뜻이 적극적으로 실현되기를 갈망하고 추구해야만 하며, 그분의 뜻을 행할 기회를 기뻐하며 감사히 고통을 이겨 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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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셀름 신부의 성탄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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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은 사랑이시다] -샤를 드 푸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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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하는 능력] - 로먼 크르즈나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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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에 힘이 되어준 한마디] - 정호승 산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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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는 통하지 않을까] - 황창연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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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안에서 하느님을 찾아라] -쟌느 마리 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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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에서 생기를] - 성녀 마더 데레사, Tezze 로제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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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연] - 배철현 저. 21세기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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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성요한과 진리의 산길 -토마스 머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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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섬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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