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보다 아무것도 더 낫게 여기지 말라.
Chisto omnino nihil praeponant. R. B.
– 머리말 72,11
‘늙은 호박’은 보통명사다. ‘익은’이 아니라 ‘늙은’이란 관형어가 이토록 원숙하고 의젓한 의미로 통용되는 에가 호박 말고도 또 있을까. 늙은 오이가 ‘노각’으로 대접받기도 했지만 호박과는 견줄 바가 못된다. 원래 호박은 곡식이 아니라 채소다. 그러나 늙은 호박은 채소라고 부르는 건 영 난처하다. 일단 늙기만 하면 호박은 곡식과 비슷한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채소가 곡물의 단계로 격상한 것이니 그건 단연 시간의 힘이었다. 긴 시간 땅기운을 빨아들였기에 품은 기운이 야물었고 저장이 가능했고 끼니가 될 수 있었다. 할매들은 커다란 늙은 호박을 가마솥에 뜨끈하게 삶아서 숟가락으로 얄미얄미 퍼 드셨다.
과일은 달콤한 과육 속에 씨앗을 담아둬 동물을 유혹한다. 단 것을 좋아하는 포유류의 특성을 맘껏 활용해 제 씨를 퍼뜨리려는 전력이다. 동물은 과당의 단맛을 섭취하는 대신 씨앗을 운반해 식물의 영역확장을 돕는다.
사과든 수박이든 그냥 민들레 홀씨 같은 걸 달아둬 바람에 날려가게 만들어도 좋았을 텐데 굳이 동물이 개입하게 한 식물의 의도 - 혹은 신의 의도? - 는 들여다 볼수록 흥미진진하다.
그러고 보면 내가 수박이나 사과의 단맛에 도취하는 건 단순한 기호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전 지구적인 모종의 거래라고 할 만한 행위였다. 서로의 생명을 유지하는 고리가 바로 단맛이라는 걸 발견하고 나는 뒤늦게 무릎을 친다.
엄마는 찬찬히 밟은 메줏덩이를 쳇바퀴에서 빼내 짚으로 만든 굴레를 씌웠다. 짚에는 ‘바실러스 서브틸리스’ 라는 미생물이 있어 발효를 돕는다는 것인데 이 미생물은 유독 물 맑고 볕 좋은 한국 땅에서만 활발하게 작용한다는 별난 놈이다. 바실러스 균의 존재를 전혀 모른 채 엄마는 “짚으로 굴레를 해야 메주가 뜬데에, 딴 걸로 하면 고만 생메주가 되뿐다. 메주 담는 본법이 그거다”라고 했다.
물론 장은 세계 여러 곳에 있다. 그러나 우리 된장 같은 맛을 내는 장은 어디에도 없다.
‘괸다’는 말을 안동에서처럼 자주 쓰는 지역이 또 있을까. 제사에 올리는 모든 음식을 괴었고, 사랑상에 올리는 반찬도 괴었고, 심지어 소꿉 사는 아이들은 마당에 실없이 돌멩이도 괴었다.
괸다는 건 차곡차곡 쌓아 올린다는 말이지만 기계적으로 쌓는 건 괴는 것이 아니다. 바로 정성! 지극정성을 바쳐 차곡차곡 쌓는 것이 ‘굄’이었다. 고기도 괴고, 포도 괴고, 실과도 괴고, 산적도 괴고 떡도 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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