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보다 아무것도 더 낫게 여기지 말라.
Chisto omnino nihil praeponant. R. B.
– 머리말 72,11
최현순 지음 | 바오로딸 | 2020년 7월 14일 출간
p.29 은총이라는 말은 신약성경에 많이 나오는 ‘카리스’라는 말의 번역이다. 은총은 은사와 다른데, 은사는 ‘카리스마’로서 은총의 결과, 곧 은총이 우리에게 주어졌을 때 우리 안에 생기는 어떤 효과를 가리킨다. 구약성경의 히브리어가 그리스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카리스로 번역된 단어들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헨hen과 헤세드hesed다.
p.29 헨은 어떤 호의, 매력, 사람을 끄는 힘을 의미한다. 신학적으로는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가지시는 호의, 총애, 사랑을 가리킨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은총을 받았다’라는 의미를 구약성경에서는 전형적으로 ‘하느님의 눈에서 헨을 보았다’라고 표현한다. 일반적으로 헨은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갖는 사랑, 총애를 가리키며, 하느님이 인간을 바라보시는 눈빛, 그 마음을 가리킬 때도 사용한다. 헨은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어떤 행동이나 활동을 가리키기보다 하느님께서 근본적으로 마음에 품으신 사랑을 가리킨다. 하느님은 한번 베푸신 헨을 결코 거두지 않으신다.
p.46 사람들 사이에서도 사랑하는 마음은 구체적으로 표현된다. 어떤 눈빛, 태도, 말투, 행위 등은 그것들을 가능케 하는 사랑의 마음에서 온다. 하느님이 인간에게 품으시는 사랑인 헨도 인간이 체험할 수 있는 방식으로 실현된다. 그렇게 구체적으로 표현된 사랑을 가리키는 단어가 헤세드다. 근본적으로 ‘충실함’이라는 의미를 지닌 헤세드는 종종 은총, 자비, 자애, 선의 등으로 번역된다.
p.47 헨이 항상 단수로만 사용되는 것과 달리 헤세드는 복수로도 많이 사용된다. 헨이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근본적인 마음을 가리키는 반면, 헤세드는 그 사랑의 구체적인 행동들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헨이 하느님이 지니신 우리에 대한 근본적인 성향과 마음이라면, 헤세드는 근본적인 성향 때문에 나오는 구체적인 행위를 가리킨다.
p.57 사도행전에서 은총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비롯된 구원 업적에 관한 것이다. 이것은 은총을 올바로 이해하게 해주는 중요한 요소로, 성경에서는 은총에 대한 개념을 내게 좋은 것, 내게 이익이 되는 것, 내 마음에 드는 것 등 나를 위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업적을 가리킨다.
p.59 은총에 대한 개념을 그리스도 사건과 연결시키는 형태는 바오로 서간 곳곳에서 발견된다.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여러분이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셨습니다.”(2코린 8,9) 라는 말씀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은 육화의 신비, 곧 하느님이 사람이 되신 신비, 그리고 이로 인해 우리에게 선사된 변화다. 교부들은 우리의 이런 변화를 신화 神化라고 표현했다. 신화란 인간의 신격화나 신성화, 인간이 하느님이 된다는 말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느님의 존재 방식, 곧 성부, 성자, 성령, 세 위격의 존재 방식으로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존재 방식은 위타적爲他的 사랑 곧 타자를 위한 사랑이고, 인간이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한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사랑의 존재 방식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사랑 안에 살고 있다면 신화는 이미 시작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바오로 서간은 하느님이 사람이 되심으로써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곧 하느님의 부요함과 우리의 가난 사이에 일어나는 이 ‘놀라운 교환’을 가리켜 은총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은총은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사건을 가리킨다.
p.63 하느님은 당신 약속에 충실하신 분이고 그래서 항상 의로운 분이시다. 이스라엘이 올바른 길에서 벗어났을 때에는 여러 번 여러 가지 모양으로 그들을 바르게 인도하심으로써 이스라엘이 다시 충실할 수 있도록, 곧 의로움을 얻을 수 있도록 하셨다.
그리고 마지막 시대에 당신 아들을 보내심으로써 결정적으로 그 의로움을 이루신다. 히브 1,2 참조. 말씀이 사람이 되신 분, 곧 예수 그리스도는 죄 외에는 우리와 모든 면에서 같아지셨고 인간을 대표하여 하느님께 순종하셨다. 그분이 지상 생애 동안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이 곧 나의 양식이다.”라고 하신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오로지 아버지의 뜻만을 위해 사셨고, 마침내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셨다. 이렇게 함으로써 인간을 대표하여 의로움을 이루신다. 하느님의 자비가 의로움을 이루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하느님에게 ‘자비’와 ‘의로움(정의)’은 서로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자비가 정의보다 더 크며, 자비로부터 정의가 나오고, 자비가 정의를 완성한다.
p.66 은사라고 번역하는 ‘카리스마’는, 막스 베버가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특정 능력을 발휘하거나 지도력을 가졌을 때 카리스마를 가졌다고 표현하면서 일상에서도 많이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신학적으로 볼 때 카리스마는 능력을 가진 사람에게만 사용하는 단어가 아니다. 카리스마는 카리스 곧 은총의 결과다. 따라서 성령의 도유를 받은 사람들은 모두 카리스마를 받은 것이다. 은사를 특이하고 열광적인 어떤 것으로만 생각하는 것은 신학적으로 올바른 생각이 아니다.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세례 때에 성령의 도유를 받았고, 따라서 그 사람 안에는 은총의 효과 곧 카리스마가 있다.
한편 은사는 그 사람을 위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위해 주어진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데, 공동체에서 갈등을 일으키는 원인 중 하나가 은사를 자신만의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탁월한 통솔력을 가졌고, 어떤 사람은 남을 위로하는 능력을 가졌다. 어떤 사람은 언변이 뛰어나고, 또 어떤 사람은 말주변은 없지만 다른 사람을 무장해제시키는 능력이 있다. 어떤 사람은 천성이 부드럽고 따뜻해서 누구와도 잘 지내고 어떤 사람은 일을 추진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p.73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물론 다양한 은사가 필요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은사의 종류나 크기가 아니라 그 은사를 받은 사람이 얼마나 하느님 앞에서 충실히 살아가느냐 하는 것이다. 관건은 하느님의 뜻을 찾는 것, 하느님께 시선을 두는 것, 그래서 그분의 시선에 따라 움직이고 그분의 시선이 머무는 곳에 그분이 주신 은사를 사용하는 것이다. 거기에 하느님 나라가 도래할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 나라란 어떤 영토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은총은 하느님 나라의 도래와 관련이 있다.
p.87 동방교회 신학에서 은총에 대한 이해는 신화에 집중되어 있다. 동방교회 신학은 개별적 인간에게 집중하기보다는 전체로서의 우주에 더 관심을 가졌다.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이 세상을 어떻게 완성하실 것인지, 개인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더라도 그 사람의 죄나 죄의 용서에 국한시키지 않고 그 사람의 궁극적 완성에 중점을 두었다. 이 세상은 창조에서부터 종말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큰 과정을 가지고 있고, 하느님께서는 이 과정을 주관하신다. 그리고 하느님의 이러한 활동 전체가 은총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동방교회 신학에서 은총은 어떤 개별적인 선善이라기보다는 하느님의 이러한 활동, 나아가 하느님 자신이다.
p.119 하느님을 향한, 그리고 하느님께서 이끄시는 이 여정에서 우리는 때로 하느님이 이끄시는 방향과 정반대로 움직일 수도 있고 수시로 그 방향에서 빗나갈 수도 있다. 그것이 고의든 무지의 소치든 말이다. 그런데도 시선을 하느님께로 돌리는 순간 우리는 어느새 하느님이 이끄시는 방향으로 와있을 것이다. 이것이 우리 신앙의 신비고, 하느님 자비의 신비다.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은 죄를 짓지 않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지은 다음에 다시 그리스도와 시선을 맞출 수 있는 데에 있다. 그리고 바오로는 이를 두고 가슴 벅찬 고백을 한다.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로마 5,20)
p.155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심은 이 창조 안에 당신의 선하심이 드러남이고, 피조물에 불과한 우리가 하느님과의 친교를 궁극적 목적으로 함으로써 그 선하심 또한 충만하게 드러나는 것, 곧 하느님의 영광이 충만하게 드러나는 것을 의미한다. 이레네오 성인은 창조와 하느님의 영광 사이의 이 관계를 다음과 같이 아름답게 표현한다. “살아있는 인간은, 하느님의 영광이고 인간의 삶은 하느님을 바라보는 것이다(Gloria enim Dei vivens homo, vita autem hominis visio Dei).
p. 156 의화가 하느님과 그리스도께 영광,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이루어진다는 말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위와 같이 인간이 지극히 고귀한 목적을 위하여 창조되었지만, 자신의 힘만으로는 그 목적에 도달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과 삶, 그분의 존재 자체, 특히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인간에게 “새로운 길(사도 9,2)을 열어놓으셨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이루신 하느님의 구원을 받아들이는 이들에게 하느님 자녀 됨의 은총을 허락하셨고, ‘하느님과 같으신’ 그분이 걸으신 길, 그분이 사셨던 삶의 방식은 ‘하느님을 뵙게 됨’, 신학자들이 지복직관이라고 불렀던, 우리의 긍극 목적에 도달하는 ‘길이요 진리’가 되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고 받아들임으로써 의화된 이들은 하느님과 그리스도께 찬미를 드린다는 의미에서 영광을 드리는 것이기도 하지만, 하느님과 그리스도 안에 드러나신 하느님의 선하심을 드러낸다는 의미에서 그분께 영광이 되는 것이고, 의화가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새로운 길’에 있어 출발점이 된다는 의미에서 의화는 영원한 생명을 목적으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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